여운형의 경우는 너무 유명하니까 넘어가지만,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하자면, 여운형의 복권은 조봉암의 복권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조봉암에 대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그의 죽음이 한국 정치지형이 우익'만'으로의 재편과 반공체제의 공고화를 완성해 가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조봉암이 복권된다면 해방 후 한국정치 스펙트럼의 일부가 실제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다르게 복권이 쉽지 않을 것이다.
김재봉, 구연흠, 권오설 등의 이름은 낯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공산당과 관련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
김재봉은 3ㆍ1 운동 참가 경력이 있고, 1923년 5월에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입국해서,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작업을 주도했다. 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차 조공사건' 때 잡혀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44년에 사망하었다.
-
구연흠은 24년 [동아일보] 지방부장, 25년 [시대일보]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 등으로 있으면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해서, 혁명자후원회(모쁠) 위원을 거쳐 책임자를 역임했다. '2차 조공사건'을 피해 상해로 망명한 후, 계속적인 활동을 펼치다 30년 상해에서 3ㆍ1운동 기념시위, 6ㆍ10만세운동 기념시위, 8ㆍ29망국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35년 만기출옥 후 37년 사망하였다.
-
권오설은 가세는 빈한했지만 안동의 명문 세가 출신으로 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퇴학당했다.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이후 꼬르뷰로 국내부에 가입하여 노농총야체이까 책임자가 되었다. 25년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12월 박헌영에 이어서 책임비서가 되었다. 26년 천도교 구파와 함께 6ㆍ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선전물을 작성, 인쇄했다. 6월 '2차 조공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28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렴에 걸려 고생하다가 30년 4월 17일 옥사했다.
이런 그들이
'대한민국' 서훈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활동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거나 또는 "건국을 직접 방해하거나 저지한 활동을 하지 않은 활동가"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들의 서훈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죽은 자들이 서훈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주의자의 후손으로 한을 묻고 산 후손들에게 조금이라도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조건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은 접을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권오설의 동생인 권오직도 형 못지 않은 활동을 한 운동가였지만 이번 서훈에서 빠져있다.
-
권오직은 7살 위인 형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운동에 참여하여, 25년에는 고려공청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수학하였다. 귀국 후 30년 3ㆍ1 운동 11주년 기념일을 맞아 광주학생운동으로 고조된 반일감정을 격발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다 체포된다.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한 후에 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등을 지내다가 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자 38선 이북으로 피신했다. 50년 2월부터 52년 1월까지 헝가리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사로 활동했고, 그해 3월 중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지만, 53년 8월 소환되어 반당ㆍ반국가 파괴분자라는 이유로 숙청되어 평안북도 삭주의 농장으로 추방되었다.
참고로 위의 모든 약력은 대부분 '강만길ㆍ성대격 엮음,[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에 근거했다.
동일한 활동을 했던 형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것은 단 한가지 이유이다. 권오직은 북에서 활동을 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권오직은 북에서도 숙청당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빌미로 남로당 인사들에 대한 숙청인 '박헌영, 이승엽 사건'에 연류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파벌이 '정통'인 나라를 세우지 못한 죄로 권오직은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권오직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이건 승리자의 칼날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숱한 이름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