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제목은 '龍과 龍의 大激戰'이다. 이 소설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소제목을 살펴보면 대략의 내용을 알 수 있다. 1. 미리님의 나리심, 2. 天宮의 태평연(太平宴), 반역에 대한 걱정, 3. 미리님이 제출한 민중진압책, 4. 부활할 수 없도록 참사한 야소(耶蘇), 5 미리와 드래곤의 同生異性, 6 地國의 건설과 天國의 공황, 7 미리의 출전과 上帝의 우려, 8 天宮의 대란, 上帝의 飛去, 9 天使의 行乞과 도사의 神占, 10 xxx 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기본 골격은 천상을 지배하는 상제와 그를 보좌하는 천사, 그리고 상제의 대리인으로 지상을 통치하는 미리님을 기본적인 구조로 하고 있다. 거기에 반역자와 혁명의 상징으로 드래곤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리와 드래곤이 모두 용을 뜻하는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드래곤은 무엇이냐, 상제가 태고 인민들의 미신적인 받들음을 받아 제위에 오르던 제5년에 허공 가운데서 탄생한 일태(一胎) 쌍생의 괴물이 있었던바, 1은 드래곤이 곧 그것이요, 또 1은 곧 현재 천궁의 시위대장으로 동양총독을 겸한 유명한 미리니, 미리나 드래곤이 漢字로는 다 '龍'이라 번역한다. 그 뒤에 미리는 늘 조선, 인도, 중국 등의 나라에서 장성하여, 드디어 동양의 용이 되어 석가, 공자 등의 소극적 교육을 받아 상제의 충신이 되어, 늘 복종을 천직으로 알므로 지배계급의 주구인 종교가, 윤리가들이 모두 미리를 인간세상의 모범의 신으로 존봉하여 왔으므로, 조선의 신화에나 중국의 유교경전에나 인도의 불경에 다 용을 비상히 찬미하여 상제에 짝하였다. 그래서 상제께서 미리를 발탁하여 동양진수(東洋鎭守)의 대임을 준 것이요, 드래곤은 늘 희랍, 로마 등지에 체재하여 드디어 서양의 용이 되어 늘 반역자, 혁명자들과 교유하여 '혁명', '파괴' 등 악희(惡戱)를 즐기어 종교나 도덕의 굴레를 받지 않는 고로 서양사에 매양 반당(叛黨)과 난적(亂適)을 드래곤이라 별명하여 왔었다. 근세에 와서는 드래곤이 또 허무주의에 침혹(沈惑)하여, 더욱 격렬한 혁명행위를 가지더니, 마침내 야소기독(耶蘇基督)을 참살한 흉범이 된 것이다."
재미있지 않나? 미리와 드래곤의 대비는 일종의 유머적인 요소로도 보여질 뿐만 아니라 이 당시 신채호가 서양사에 대해서도 상당한 독서를 했다는 것 또한 알려 준다. 더구나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미리보다는 서양적인 드래곤을 역사의 주체로 서술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와 더불어서 미리와 드래곤의 대비와 함께 눈길이 가는 부분은 민중진압책과 드래곤의 반역논리이다.
"강국의 민중은 아주 그 타력적(惰力的)인 애국심을 가진 동시에 나라를 지배계급의 나라로 오인하여 지배계급의 세력을 확장 증진케 하는 일을 애국으로 잘못 믿어 그 애국심이 거짓된 애국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즉 강국의 민중에게는 얼마큼 보통선거의 권리 같은 것, 노동임금의 증가 같은 것이나 허락하여 주고, 일면은로 그 거짓된 애국심을 장려하여 약소국의 민중을 정복케 하며, 식민지의 민중을 압박케 하여 지배계급-자본주의-의 선봉이 되게 하면 그들의 고픈 배가 다시 이 이익 없는 허영에 불러져 우리가 비록 몇십년 동안 그들의 피를 빨아 먹어도 아픈 지를 모를 것이요"
이것이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변화인 것이다. 애국심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애국심의 이데올로기적 오용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현재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의 오용에 대해서 신채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익 없는 허영에 불러"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OO민중들이 야소를 죽인 뒤 미구에 공자, 석가, 마호멧......등 종교, 도덕가 등을 때려 죽이고, 정치, 법률, 학교, 교과서 등 모든 지배자의 권리를 옹호한 서적을 불지르고, 교당, 정부, 관청, 공해, 은행, 회사......등 건물을 파괴하고, 과거의 사회제도를 일체 부인하고, 지상의 만물을 민중의 공규임을 선언하였다. 모든 지배계급들이 반민을 정복하려 하여 군인을 소집하나 원래 민중의 속에서 온 군인들인 고로 다 민중의 편으로 돌아가버리었다."
아나키즘의 영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전형적인 혁명론이다. 반종교, 반국가, 반자본주의의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 1910년 전후의 민족주의 사학과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신채호의 이런 변화가 어떤 계기로 이루어졌는지 그 이유가 사뭇 궁금하다. 여하튼 신채호는 깨어있는 지식인이며 실천가였던 듯 싶다. 20년대 중반 이후의 신채호의 고민이 보다 폭넓게 알려지기를 바래본다.